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행 11: 1-18

들어가면서

짙은 안개를 헤치며 전함 한 척이 해안을 순시하고 있었습니다. 그 배에는 해군 제독이 승선해 있었습니다. 여러분 해군 제독이 뭔 지 아시죠? 예. 육군으로 말하면 장군입니다. 제독을 태운 배가 안개를 뚫고 항해하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작은 불빛이 나타났습니다. 전함이 가까이 갈수록 빛은 조금씩 밝아졌습니다. ‘저 배 뭐지?’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저 맞은 편 불빛에서 무선 통신이 날아왔습니다. “경고합니다. 지금 맞은편 항로에서 시속 15노트로 접근하고 있는 함선은 즉시 좌측 45도로 항로를 변경하십시오.” 그 무선을 받은 제독은 불쾌해 하면서 무선으로 회신했습니다. “지금 경고하는 쪽이 먼저 돌리시오.” “안됩니다. 그쪽이 돌려야 합니다.” 화가 난 제독이 소리쳤습니다. “당신 누구야? 나는 해군 제독이다.” “충성! 저는 해안경비대 소속 아무개 소위입니다.” 제독이 소리쳤습니다. “야 임마, 소위 주제에 누구 보고 가라 마라야? 당장 안 비켜?” 그러나 소위는 고집불통이었습니다. “안됩니다. 제독님이 항로를 바꾸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가 한 마디를 더 했습니다. “제독님. 여기는 등대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타락한 인간들의 모습을 아주 잘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인간을 만드시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건 바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뱀의 유혹을 받고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마음속에는 나도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만 하는지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등대처럼 빛을 발하실 때 비켜주세요. 하나님! 왜 저보고 비키라고 하세요? 하나님이 비키세요. 이렇게 말할 때가 너무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바벨탑을 세워서 우리가 흩어짐을 면하자라고 했습니다. 자기들이 항로를 바꾸는 대신에 등대에게 항로를 바꾸라고 한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아무리 말씀하셔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어이 파멸의 길로 갔습니다. 항로를 바꾸는 것은 등대를 이롭게 하는 일이 아니라 배의 안전을 위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안 듣는다고 해서 하나님께는 하등 손해 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대항하고 자기 고집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지금 여기 있는 우리도 예외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말합니다. “아니에요. 하나님! 하나님이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셔도 제 생각은 달라요. 하나님이 생각을 바꾸세요.”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여러분의 생각과 충돌을 일으킨다고 생각할 때가 없습니까? 그 때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 배의 키를 돌려야 하는데 때로는 등대를 향해서 돌진하면서 등대보고 피하라고 말하지는 않습니까?

1. 내가 걸림돌이 되고 있지는 않나?

사도행전은 1: 8의 순서대로 진행됩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하나님의 증인이 되리라는 주님의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어 가는지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때 제일 방해가 되는 게 뭐였습니까? 때로는 불신자들의 핍박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때로는 교회 공동체 식구들끼리 마음이 안 맞아 다투고 그것 때문에 복음 전파가 방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마지막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을 방해하는 게 뭔 지 아십니까? 바로 성도들 자신이었습니다. 가장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할 성도들 자신이 주님의 사역에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행 10장의 말씀은 교회의 지도자 베드로의 껍질이 벗겨지는 사건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방인과 교제할 수 없다는 베드로의 생각이 깨지면서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와 그의 가족이 구원을 받는 감격적인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가이사랴에서 이 영광스러운 사역을 마치고 베드로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귀한 사역을 마치고 온 사도를 향한 감사와 환영의 박수가 아니었습니다. 눈을 치켜 뜨고 베드로를 노려보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절에 보면 그들이 베드로를 비난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비난했다는 말은 단순히 질책했다거나 이의를 제기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주 적대감을 가지고 상대를 의심하면서 정죄의 의도로 비난하고 논쟁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났을까요?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이 구원 받은 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 전한 것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 3절 같이 읽어볼까요?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그들이 이렇게 두 눈 똥그랗게 뜨고 베드로를 비난한 가장 큰 이유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서 식사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건 수천년 동안 유대인의 삶에 내려오면서 그들의 DNA 안에 녹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그게 상식이고 더 나아가 그게 진리라고 자기도 모르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하나님의 말씀도 아니고 성경의 가르침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들을 꽉 붙들고 있었던 겁니다.

문제는 그들의 그런 생각이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과 충돌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 동안 예루살렘 교회는 어마어마한 핍박을 이겨냈습니다.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심지어 순교자도 나왔습니다. 교회는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전진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크고 작은 문제가 있었지만 기도함으로 잘 이겨내고 다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지막으로 그들의 발목을 붙잡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10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미 베드로는 그 동안 갇혀 있던 전통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서 고넬료의 집을 방문해서 복음을 전했고 고넬료의 가족과 지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는 감격적인 일을 경험했습니다. 최고 지도자였던 베드로의 생각이 바뀌었다고 자동으로 온 성도들의 생각이 바뀌는 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도들 생각에는 수 천년 이어오는 바람에 상식이고 진리인 것처럼 생각되는 전통이 예수님의 지상명령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되었던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게 이겁니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들 중에 우리가 극복하기 힘든 마지막 싸움은 바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들은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을 받은 사람들이었고 그 놀라운 광경을 보고 회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고 핍박하는 사람들에게 맞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 자신이 복음 전파의 걸림돌이 되고 있었습니다.

내가 복음 전파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내가 하는 말, 내가 하는 행동, 나의 좁은 생각이 수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나아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엄마 아빠의 이중적인 삶의 모습이 자녀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정말 훌륭한 분인데, 가정에서는 폭군처럼 느껴지는 아빠를 보면서 아이들이 교회를 떠나갑니다. 목사님과 통화할 때는 천사같은 우리 엄마가 나한테는 악마처럼 보일 때 아이들은 기독교 신앙의 진실성에 의심을 가지게 됩니다.

교회에 갔다가 우리 회사 골통 과장님을 만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면서 교회에 못 나오겠다고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너무 이기적이고 너무 무례하고 너무 잘난 척하는 교인들을 보면서 저렇게 사는 것 보다는 교회 안 다니더라도 착하게 사는 내가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우리가 주위 사람들을 실망시킬 때 우리들 자신은 그걸 잘 모른다는 겁니다. 내 나름대로 옳은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나도 수 십년 동안 내 DNA 안에서 그런 걸 녹여냈기 때문입니다.

교회들 중에 경상도 목회자가 있는 교회에는 경상도 사람이 모이고 전라도 출신 목회자가 있는 곳에 전라도 사람이 모여 있는 경우가 가끔씩 있습니다. 어차피 교회 갈 건데 그래도 우리 고향 출신 목회자가 있는 교회가 좋지 않나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까지는 애교로 봐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하고 고향이 다르면 아예 나쁜 사람처럼 대하고 편견을 갖고 바라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말입니다. 성경보다 오랜 세월 내 속에 녹아 있는 잘못된 생각이 말씀의 가르침을 눌러버리는 겁니다.

정말 형제처럼 지내던 집사님이 선거 때 내가 지지하는 당 말고 다른 당 후보자에게 투표한 걸 아는 순간 거의 벌레 보듯이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사이 좋던 분들이 갑자기 사이가 멀어집니다. 어떻게 그런 당을 지지할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수많은 편견들이 내 신앙 생활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이런 내 생각, 내 행동이 주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고 내가 주님의 일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베드로의 설명

그렇다면 베드로는 이런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베드로는 자기가 경험했던 이야기를 그들에게 들려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10장에서 일어난 고넬료 가정의 회심 사건을 다시 베드로의 입을 통해 들려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이 누가입니다. 우리는 누가가 굳이 이렇게 거의 똑 같은 내용을 두 번이나 기록한 걸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10장에서는 그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그 사건을 기록했습니다. 11장에서는 베드로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거의 같습니다. 사실 이렇게 기록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복음을 전한 일을 그들에게 다 설명하였더라. 이렇게 한 줄로 기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굳이 거의 같은 내용을 두 번이나 기록했습니다. 이게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하는 중요한 자세입니다. 그는 너무 중요한 일을 몇 번씩 기록합니다. 예를 들면 바울이 예수님 만난 사건도 세 번이나 나옵니다. 오늘 이 본문도 두 번이나 기록한 걸 보면 그만큼 이 사건이 중요하다고 본 겁니다.

1) 베드로의 설명: 하나님께서 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을 설명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가 왜 고넬료 가정에 찾아가서 같이 식사를 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었는지 그가 설명하는 것을 같이 살펴봅시다.

먼저 우리 7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 8절에 보면 베드로는 이 소리가 주님의 소리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3번이나 자기가 더럽게 생각하던 음식을 먹으라는 말씀을 하셨다는 겁니다. 베드로가 저는 먹을 수 없습니다 라고 했지만 주님께서 3번이나 말씀하시면서 네 생각대로 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대로 하라고 했다는 겁니다.
이제 우리 같이 12절을 읽어봅시다.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세 사람이 찾아왔는데 그 때 성령께서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베드로 마음대로 간 게 아니라 성령께서 말씀하셔서 갔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과 대화하다 보니 그들이 베드로를 찾아온 이유를 말했는데 13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천사가 베드로를 청하라고 해서 왔다는 겁니다. 이제 우리 15절을 읽어봅시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그러니까 베드로 자신도 이방인과 함께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는데 주님께서 세 번이나 말씀하시고 성령께서 함께 가라고 하시고 그들도 천사들의 말을 듣고 왔다고 했고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 전할 때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재하시더라는 겁니다. 그 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나는 성령으로 세례 줄 거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고 했습니다. 결국 베드로의 말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 모든 일은 내 생각과는 달랐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나도 순종했다는 겁니다. 이렇게까지 말한 후 베드로는 마침내 결론을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 같이 17절을 읽어봅시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

같이 한 번 따라 해 봅시다.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베드로의 이 말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반응할 때 필요한 자세입니다.

2) 내가 누구이기에

여러분! 내가 누구입니까? 보통 우리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하면 내 앞에 서 있는 어떤 사람과 비교해서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예를 들면 부부 싸움을 했어요. 그러면 자기 배우자와 자기를 비교하는 겁니다. 자기 배우자가 엄청 잘못했고 자기는 약간 잘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싸우는 겁니다. 만일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금방 사과하겠죠.

내가 진짜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왜 용서를 못할까요? 나는 피해자이고 그 인간이 가해자이기 때문이죠. 이럴 때는 정말 방법이 없습니다. 용서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배우자와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질문이 뭡니까?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싸우는 어떤 사람과 나를 비교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서 보는 겁니다. 우리는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 먼지 같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먼지 같은 내가 온 우주의 주인 앞에 설 때 내 초라한 모습, 죄인 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먼지만도 못한 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 주시고 나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일만 달란트 빚졌다가 용서 받은 사람임을 알게 되는 거죠. 그러고 나서 내가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했던 그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은 내게 백 데나리온 빚을 진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죠.

우리가 우리의 오래된 잘못된 생각을 깨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지역 감정이 웬 말이며 하나님 앞에서 정치적 성향으로 인한 갈등이 웬 말입니까? 그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할 때 우리는 도저히 손 잡을 수 없는 사람을 향해 손을 내밀 수 있게 됩니다.인종간의 갈등, 남녀의 갈등, 세대 간의 갈등..... 등 그 어떤 사람도 다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제가 신대원에 들어갔을 때 1991년이었습니다. 특별히 지역 갈등이 심했던 80년대를 보내고 90년대 초에 신대원에 들어간 겁니다. 그때 당시 신대원 기숙사 방을 정할 때 자기가 아는 사람과 같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살던 방에는 제가 잘 아는 대구 출신 학생 4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방 건너에는 광주 출신 학생 4명이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 두 방 학생들이 의기투합했습니다.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신대원 학생들부터 지역 감정을 허물자.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 두 방 학생 8명이 서로의 방을 오가며 기도회를 했습니다. 하나님! 이 나라에 깊이 박힌 지역 감정을 우리부터 허물게 하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다 보니 그 전라도 형제들이 너무 소중한 분들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같이 기도하고 끝나면 같이 식사도 하고 탁구도 치고 그러면서 두 방 학생들의 우애가 아주 깊어졌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 제 아내를 소개 받았는데 전라도 여수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게 저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 두 사람이 결혼하면 지역 감정이 많이 옅어지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영호남 커플이 탄생했습니다. 참 놀라운 건 우리 교회 윤시온 목사님은 전라도 사람, 사모님은 경상도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 이성헌 목사님은 경상도 사람, 사모님은 전라도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 목회자들 중에 세 커플이나 영호남 커플입니다. 앞서 개척하신 박요한 목사님은 충청도 사람, 신영태 목사님은 경기도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면 그 사람의 고향이 어디인지 그것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마음으로 우리가 우리 교회에 오시는 외국인들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우리 보다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고 하대하는 건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 연약한 죄인이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형제라는 마음으로 그들을 품고 가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새터민들도 많이 있습니다. 생명을 걸고 이 땅으로 오신 그분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같이 품어주어야 합니다. 그들을 볼 때 내가 더 나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 분들을 무시하는 사람은 정확하게 말하면 아직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서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크심과 자신의 작음을 본 사람은 기꺼이 모든 사람을 형제로 품을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베드로가 말했던 것처럼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론적으로 다 알면서 우리는 자주 교만함에 빠져 다른 사람을 거부하고 밀어내고 정죄합니다. 아이들이 부모님 말씀 듣기 싫을 때 두가지 행동을 합니다. 하나는 적극적인 반항이고 또 하나는 태업입니다. 태업이 뭔 지 아세요? 부모님이 무서워서 순종하기는 하는데 아주 천천히 억지로 하는 겁니다. 엄마가 소리칩니다. 야! 너 학교 늦었는데 빨리 안 해? 그러면 아이가 천천히 움직이면서 ‘하고 있잖아’라고 합니다. 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태업 상태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뭘 원하는지 다 압니다. 아예 불순종하기에는 부담스럽습니다. 그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태업을 합니다. 순종하는 것 같기는 한데 아주 느리게 겨우 억지로 시늉만 하는 겁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아직도 다른 사람들을 제대로 품지 못하고 그들을 미워하고 차별하고 싫어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는 베드로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이방 형제들을 받아들였던 것을 기억합시다. 말도 안 되는 죄인들을 위해서 생명을 내 주신 그리스도 앞에 다시 섭시다. 오늘은 특별히 성찬식이 있는 날입니다. 주님께서 문제 투성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자기 몸을 찢어 주시겠다는 뜻으로 보여 주신 성찬식을 통해서 다시 아버지의 마음을 회복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품고 가는 주님의 백성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