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세상 흔들림 없는 소망
창세기 23: 1-20 (435)
들어가면서
저는 목회자로서 수많은 장례식에 참석해 보았습니다. 장례식장에 가면 내가 조문하려는 가정 말고도 그 주위에 있는 다른 가정에서 장례를 진행하는 광경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떠나 보낸 이후 사람들은 그들이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굉장히 다른 장례식을 치르는 걸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삶은 없고 죽으면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설명할 수 있는 한 단어가 있다면 바로 절망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한 줌의 재로 돌아올 때 그들은 절망하고 탄식하고 절규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장례식에 참여해 보면 그들에게도 똑 같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낸 깊은 슬픔이 있지만 그들에게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 부활에 대한 소망이 슬픔 속에 있는 그들을 위로해 주고 새 힘을 북돋아줍니다.
1.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통했던 아브라함
오늘 본문에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장례식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보여줍니다. 고대 근동에서 여성의 위치는 굉장히 미미했습니다. 당시는 모든 역사가 남자 중심으로 돌아가는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성경, 특히 창세기에서는 여성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사라, 리브가, 레아, 라헬, 다말 등 창세기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저마다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자기 인생을 운명에 맡기고 수동적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없던 길을 만들었고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모험을 감행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두 번이나 남의 나라 왕의 부인이 될 뻔 했던 사라도 나이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죽음의 길로 가게 됩니다. 사라가 죽을 때 그녀의 나이가 127세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한 여성이 죽을 때의 나이를 말해 주는 경우는 사라가 유일합니다. 이는 사라가 단순히 한 남자의 아내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의 어머니로서 믿음의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사라의 죽음 앞에서 아브라함은 슬퍼하며 애통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었고 하나님을 신뢰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슬픔을 억누르거나 참지 않았습니다. 천국의 소망이 있다고 해서 이별의 슬픔이 없는 건 아닙니다.
나니아 연대기를 썼던 옥스포드 교수 출신 CS 루이스는 오랫동안 독신으로 살다가 58세의 나이에 뒤늦게 ‘조이 데이비드먼’이라는 여성과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결혼한지 불과 4년 만에 그의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후에 그는 **'헤아려 본 슬픔'**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아내의 죽음을 맞은 그가 어떻게 슬픔을 극복하고 회복해 가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처음에 그는 아내의 죽음을 믿음으로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깊이 사랑했기 때문에 깊은 아픔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이 하나님을 향한 섭섭함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는데 마치 자기 면전에서 문이 닫히고 문 안에서 빗장이 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했습니다.
그는 죽은 아내를 그리워 하다가 한 가지를 깨닫게 되는데 자신이 아내를 단순히 소유하려고 했던 게 아닌가 돌아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사랑이란 상대를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감사하는 것임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내를 하나님 안에서 다시 바라보면서 슬픔을 조금씩 내려놓습니다. 슬픔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슬픔이 믿음을 완전히 삼키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믿음은 슬픔을 지워버리는 능력이 아니라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머무는 능력임을 깨달은 겁니다. 슬픔은 믿음의 실패가 아니라 사랑의 흔적입니다.
가끔씩 보면 성도님들이 상가에 가서 유족들을 위로한다고 하면서 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울지마! 천국 가셨잖아." 그건 좋은 위로가 아닙니다. 아무리 천국 가셨어도 헤어짐의 아픔과 슬픔은 있는 겁니다. 아들을 하나님의 제단에 바친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이었지만 자기 아내의 죽음에 슬퍼하며 애통하고 있는 걸 보십시오. 그건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라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좋은 위로는 같이 손잡아 주고 같이 울어주는 겁니다.
2.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막벨라 굴을 산 아브라함
아내의 죽음 앞에서 아브라함은 슬퍼하며 애통했습니다.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브라함의 눈물에 대해서 딱 두 절만 이야기합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그가 울었다는 사실보다 슬픔 이후에 그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 무려 열 여덟 절 지면을 할애합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의 사람은 슬픔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슬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슬퍼하면서도 아주 큰 관심을 가지고 한 행동이 나오는데 사라의 시신을 안치할 무덤과 주위의 땅을 사는 것이었고 이 이야기가 무려 열 여덟 절에 걸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강조점은 사라의 죽음 자체보다는 사라의 시신을 안치할 매장지를 사는 이야기인 걸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좀 의아한 장면입니다.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하는데 그 슬픔을 묘사하는 건 10% 정도이고 납골당 사는 문제가 90%를 차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당시 이 사람들은 우리처럼 땅을 파고 매장하거나 화장하지 않고 굴 속에 시신을 안치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게 하려고 하는데 자기가 가지고 있는 땅이 없었기 때문에 무덤과 그 주위의 땅을 사려고 했던 겁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고향을 떠나 왔는데 60년이 넘도록 아직 자기 땅 한 평을 갖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자기 아내 사라를 장사 지내기 위해서 겨우 무덤과 주위에 있는 땅을 조금 사는 게 오늘 본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나그네라는 말의 가장 일반적인 의미는 외국인, 타향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들은 법적으로 취약했고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거류민이라는 말은 정착은 했지만 완전한 시민은 아닌 사람입니다.
1) 땅에 대한 약속 믿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헷 족속들은 그냥 자기들 땅에 사라를 장사 지내라고 했지만 아브라함은 헷 족속의 호의를 거절하고 굳이 돈을 주고 사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막벨라 굴은 단순한 장지가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한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기 위해서 첫 발을 내딛는 의미로 그 땅을 사려고 했던 것입니다. 프로 바둑 기사가 흑점에 바둑 알 하나를 놓는 것은 단순한 한 점이 아닙니다. 그 한 점이 그 일대를 장악할 수 있는 엄청난 한 수인 것처럼 아브라함은 고작 무덤 하나를 샀지만 그것은 가나안 땅 전체를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의 행동이었던 겁니다.
창세기 22장이 하나님의 약속하신 후손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여준 것이라면 23장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막벨라 굴을 소유함으로써 하나님이 이 땅 전체를 주신다는 약속을 붙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좀 복잡해 보이지만 거래가 확실히 성사 되게 하기 위해서 굉장히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아브라함은 성문 앞에서 사람들과 거래를 합니다. 그곳에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시 성문 앞은 중요한 재판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었고 그 주위에 모인 사람들은 그 거래의 증인 역할을 한 겁니다.
만약 그들의 제안대로 땅을 사지 않고 그들의 땅에 사라를 장사 지냈다면 시간이 흘러 후손들이 자신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지 가나안 사람인지 모를 정도로 정체성을 잃어버릴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값을 치르고 그 땅을 사려고 한 겁니다. 그 때 헷 족속이 제안한 돈은 은 400세겔입니다. 그냥 자기 땅을 매장지로 쓰라고 하면서 호의를 베풀었던 사람이 정식으로 땅값을 치르겠다고 하자 은 400세겔을 요구했습니다. 사실 은 400세겔은 당시 관행으로 볼 때 굉장히 비싼 값이었습니다.
예레미야 32장에 보면 예레미야가 아나돗란 지역의 밭을 구매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17세겔에 구매했습니다. 사무엘 하 24장에 보면 다윗이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을 구매할 때 지불한 돈이 은 50세겔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에브론은 상당히 능숙하게 거래금액을 부풀렸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비싼 값을 부르는데도 한 푼도 깎지 않고 많은 증인들 앞에서 그 밭을 삽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약혼 반지 하나 주고 먼 나라에 공부하러 간 남자 친구가 있다고 한다면 그 약혼 반지는 가격이 얼마인지가 중요한 게 아닐 겁니다. 이 반지 안에는 결혼과 미래의 행복에 대한 약속이 담겨 있는 거죠.
막벨라 굴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무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눈에는 약속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보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미래를 보았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고백하는 의미가 더 컸던 겁니다.
오늘 본문이 어떻게 마무리 되는지 18-20절 같이 읽어봅시다. “성 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 데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된지라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이와 같이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이 헷 족속으로부터 아브라함이 매장할 소유지로 확정되었더라”
창세기 저자는 이 짧은 본문 안에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되었다는 것을 두 번이나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집을 살 때 계약금 조금 내었어도 이제 곧 저 집이 내 집이 되겠구나 라는 소망을 가지는 것처럼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 중에서 아주 조금 막벨라 굴을 샀지만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이 땅 전체를 주실 것을 믿었던 겁니다.
후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그게 그들의 땅이라는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그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을 뿐이라면 무슨 근거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을 자기들의 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막벨라 굴은 그 땅이 이스라엘 백성의 땅이라는 근거를 남기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겁니다.
2) 영원한 본향인 천국을 믿음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땅을 상징하는 막벨라 굴에 들어가는 것은 앞으로 그들이 들어가갈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이 약속의 땅이었던 것처럼 하나님이 예비하신 더 놀라운 약속인 천국이 기다리고 있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장례식 때 부르는 찬송 중에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갔고 그 가나안 땅은 미래의 천국을 상징하는 곳이기에 ‘요단강을 건너간다.’ 혹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는 말을 우리는 천국에 간다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막벨라 굴에 육신을 안장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약속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을 해석한 것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데 우리 같이 히브리서 11: 13-16절 같이 읽어봅시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여기 나오는 이 사람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같은 아브라함의 대가족들입니다. 이들은 믿음을 따라 살았을 뿐만 아니라 믿음을 따라 죽었습니다. 그들은 이 땅이 영원한 곳이라고 생각지 않고 돌아갈 고향이 따로 있다고 믿었습니다. 원래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였지만 자기가 돌아갈 영원한 고향은 갈대아 우르가 아니라 영원한 천국이란 걸 알았습니다. 이 땅에서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영원한 천국도 예비하셨음을 믿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의 유골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자기들이 값을 주고 산 막벨라 굴에 들어가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처럼 죽어서도 영원한 천국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영원한 천국으로 이끌어 가실 줄로 믿었던 것입니다.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장례식이 절망의 자리가 되기도 하고 소망의 자리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삶의 방식도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게 전부이고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면 어떻게 하든지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할 겁니다. 남의 것을 훔치고 빼앗는 한이 있더라도 하더라도 어떻게든 이 땅에서 모든 결판을 내야 합니다. 남을 배려하고 양보하느라 내 짧은 인생이 불행해지면 안 되니까 악바리같이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은 이 땅에서의 삶은 정말 짧은 시간이고 천국의 삶이 영원하기에 더 나은 미래를 바라보면서 이 땅에서 너무 여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좀 손해보더라도 워낙 엄청난 미래가 기다리고 있기에 양보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좀 억울한 일을 당해도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공정하게 심판해 주실 것을 믿기에 참고 견뎌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이 땅에서 너무 짧게 살다가 떠나서 남은 가족들이 그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희 선친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정말 열심히 사신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38세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당시에는 너무 안타깝고 억울한 죽음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끝난 것이 아니라 먼저 본향에 도착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모르고 백수를 누리다가 가신 것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죽음을 맞으신 것입니다.
사라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서 정식으로 아브라함의 소유가 된 막벨라 굴에 처음으로 들어간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이후에 아브라함, 이삭, 리브가, 레아 등이 차례로 막벨라 굴에 들어갔습니다. 야곱은 죽을 때 유언으로 자기의 해골을 막벨라 굴에 장사 지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건 그가 하나님이 약속한 가나안 땅에 자기 유골을 안장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간다는 믿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창세기 맨 마지막 부분에 보면 요셉이 유언을 남겼는데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갈 건데 그때 자기의 유골을 가나안 땅에 옮겨 달라고 유언을 남깁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유언 남긴 것에 대해서 히브리서 11: 22에서는 이렇게 평가합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히브리서 저자는 한 사람의 인생 중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을 한 두 줄로 요약합니다. 만일 저 보고 요셉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을 말하라고 한다면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했을 때 이겨낸 장면, 하나님의 꿈을 해몽하고 총리가 된 장면, 나중에 형들을 만난 다음 용서해 주는 장면, 이런 장면이 떠오를 것 같은데 히브리서 저자는 놀랍게도 요셉이 자기 유골을 가나안 땅으로 옮겨달라고 한 마지막 유언이 가장 놀라운 믿음의 고백이라고 말합니다.
요셉도 총리로 인생을 마무리 했기에 애굽의 매장지에 묻히고 많은 애굽 사람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던 겁니다. 자기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묻히고 자기 영혼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입성한다는 그 믿음을 가지고 죽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막벨라 굴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약속의 표지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이 땅에서의 삶에 모든 것을 걸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미래의 소망을 바라보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3)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소망
히브리서를 기록한 저자는 당시 엄청난 핍박 속에서 흔들리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이런 권면을 했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아무 것도 안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다가 마침내 그 땅을 기업으로 받았던 것처럼 성도들도 영원한 기업을 받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시고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이끌어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우리가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까지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뿐만 아니라 영원한 천국을 기업으로 얻을 수 있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소망은 막연한 낙관이 아닙니다. 우리가 천국을 소망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먼저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막벨라 굴은 닫힌 무덤이었지만 예수님의 무덤은 빈 무덤이 되었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의 소망이 더욱 확실해집니다.
특별히 히브리서 6: 19에서 이 소망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설명합니다. 우리 같이 읽어봅시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태풍이 몰아칠 때 배들은 항구로 피난 옵니다. 항구로 왔다고 무조건 안전한 건 아닙니다. 항구에 닻을 내려야 합니다. 작은 보트의 닻은 4-10kg 정도 됩니다. 그런데 대형 컨테이너 선의 닻은 무려 8-12t 정도 됩니다. 이 닻을 바닥에 내리고 있으면 왠만한 파도에도 배가 그 풍랑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소망이 영혼의 닻과 같다는 겁니다.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성도는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든든히 설 수 있다는 겁니다.
성도 여러분, 배는 바다 밑바닥에 닻을 내리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저 하늘 위,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영혼의 닻을 내립니다. 세상이 아무리 흔들려도 하나님 보좌에 박힌 닻줄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로 떠돌아 다니고 겨우 막벨라 굴 하나만 자기 땅으로 샀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 전체를 자기 후손에게 줄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굴을 볼 때마다 자기 영혼은 영원한 본향 천국으로 돌아갈 거라는 소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초대 교회 때 성도들은 엄청난 핍박으로 흔들릴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한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소망을 가지고 살았고 이런 소망을 가진 사람은 영혼의 닻을 가지고 있어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이런 소망이 없는 사람은 이 땅이 전부인 줄로 알고 살기에 핍박을 받으면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것 같습니까? 여러분은 영원한 소망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 가운데서 영원한 천국을 누릴 것을 소망하고 있습니까? 만약 이 소망이 없다면 우리는 다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천국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는데 다시 그 은혜를 기억하고 흔들리지 않는 천국의 소망을 가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런 소망을 가질 때 지금 내 눈 앞에서 내가 바라는 모든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초조하거나 불안하지 않을 것입니다. 건강 검진을 받았는데 암이라는 판정을 받았을 때, 자녀들의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 힘써 세운 사업이 무너질 때,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보낼 때 우리는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소망이 확실해질 때 우리는 더 담대히 주님과 함께 세상 한 복판에서 천국을 누리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이 제대로 된 집도 없이 텐트를 치고 나그네의 삶을 살았지만 그것이 하나도 불편하거나 힘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잠깐 이 땅에서 살다가 영원한 집으로 돌아갈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도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바라본 것은 무덤이 아니라 약속이었기 때문입니다. 막벨라 굴은 죽음의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시작되는 장소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냅니다. 우리도 눈물을 흘립니다. 우리도 흔들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붙드는 소망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의 닻은 이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에 내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소망을 붙들고 든든히 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천상병 시인이 쓴 **‘귀천’**이란 시로 오늘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