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주님이 고난을 당하셨나요?
사 53: 1-12
들어가면서
저는 군대에서 지프차 운전병으로 복무했습니다. 지프차의 범퍼에는 두 가지 숫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네 자리수로 부대 번호가 기록되어 있고 왼쪽에는 1,2,3 이런 숫자가 적혀 있습니다. 왼쪽에 있는 1,2,3 같은 숫자는 이 차를 타는 장교가 그 부대에서 서열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숫자가 1이 적혀 있으면 이 사람이 그 부대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라는 걸 보여줍니다. 2라고 적혀 있으면 두 번째 높은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차에 적혀 있는 숫자를 보면 차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차 안에 탄 사람이 별을 단 장군이라면 그냥 숫자만 적혀 있지 않습니다. 범퍼 중간에 별 판이 달려 있습니다. 원 스타면 별 하나가, 투 스타면 별 두개가 범퍼 중간에 따로 달려 있습니다. 아무 말도 안 해도 차가 말을 합니다. 이 차에는 높은 분이 탔으니 알아서 해라.
그래서 운전병들은 이런 차를 보면 절대 추월하지 않습니다. 뒤에 그런 차가 따라오는 것 같으면 알아서 길가 쪽으로 차를 빼서 그 차가 추월해 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대학교 졸업식장에 가면 어떤 가운을 입고 어떤 후드를 둘렀는지 보면 누가 박사인지, 누가 석사인지 알 수 있습니다. 회사에 가 보면 회장님은 회장님에게 어울리는 복장을 하고 계시고 청소하는 분은 청소하는 분이 입는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겉모습만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 너무나 초라한 모습을 한 존귀한 분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 신분과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52장 14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 어떤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은 원래 정말 존귀한 분이신데 너무 상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는 겁니다.
귀한 신분이면 귀한 모습으로, 높은 신분이면 그 신분의 사람답게 존귀한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고 피범벅이 된 상태로 나타나서 사람들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안 되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하나님의 팔이 그 분과 함께 하는 분이라고 해서 정말 대단한 분인 줄 알았는데 그 분을 보니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은 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한 모습이어서 사람들이 믿기 힘들어 했다고 말합니다. 그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우리 같이 2-3절을 읽어봅시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거대한 나무나 무성한 잎사귀가 달린 가지가 아니라 이제 막 땅에서 올라오는 연한 순 같아서 옆에서 보는 사람들이 아이고 저 어린 순이 제대로 살기는 하겠나 싶은 그런 모습 같았고 그 순이 뿌리를 내린 땅은 바싹 말라 있어서 저 순이 말라죽게 생겼구나 라고 생각할 것 같은 그런 초라한 모습이었다는 겁니다. 겉으로 봐서는 별로 존경할 만 한 사람이 아니었고 흠모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에게 멸시 받아서 버림을 당했습니다. 아무도 그를 귀한 분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겁니다.
2. 그 분은 바로 예수님
지금 이사야가 말하는 뭔가 이상한 이 사람이 누구일까요? 존귀한 분이라는데 전혀 존귀해 보이지 않는 이 사람의 정체가 뭘까요? 이 분은 왜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는 걸까요?
오래 전에 비슷한 질문을 하면서 이사야서를 읽었던 사람이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그는 이디오피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순례의 길을 왔다가 이디오피아로 다시 돌아가던 내시였습니다. 이 사람이 수레를 타고 가면서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궁금해하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지? 존귀한 사람인데 상처투성이이고 아름다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서 사람들에게 무시 당하는 이 사람 도대체 누굴까?’ 하면서 궁금한 마음으로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때 수레 옆으로 다가온 어떤 사람이 물어보았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그 글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아뇨. 누가 가르쳐 주면 모를까 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아시면 이 수레 위로 올라오셔서 좀 가르쳐 주십시오.” 그때 수레 위로 올라가서 이사야서에 나오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설명해 준 사람이 바로 빌립 집사였습니다. 그때 빌립은 가장 존귀한 분인데 상처투성이의 초라한 모습으로 등장한 이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걸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이사야는 예수님이 태어나기 약 700년쯤 전에 활동하던 선지자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는 예수님이 태어나기 약 700년 전에 예수님이 너무나 존귀한 분이시지만 상처투성이의 초라한 분으로 오실 거라고 예언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700년 전이면 어느 정도의 시간인지 감이 잡히십니까? 우리 나라 역사에서 지금부터 700년 전이면 고려 시대입니다. 고려 시대 어떤 예언자가 예언한 게 지금 이루어진 셈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온 우주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너무 존귀한 분이신데도 불구하고 그가 이 땅에 오실 때 너무 초라한 모습으로 오실 거라고 예언했습니다. 바싹 마른 땅에 순이 하나 올라왔는데 너무 비리비리해 보여서 저 순이 제대로 자랄까 싶은 그런 모습으로 오실 거라고 했습니다. 외모도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초라한 모습이었다고 말합니다.
요즘 예수님이 나오는 영화를 보면 예수님 역할을 맡은 배우는 아주 잘 생긴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얼굴을 그린 그림도 아주 멋진 서양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원래 예수님은 전혀 흠모할 마음이 안 들 정도로 아주 초라한 모습으로 오실 거라고 했고 실제로 갈릴리 촌놈으로 오셨습니다. 세상 사람은 겉모습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데 익숙했기에 예수님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는 저 사람은 별 볼일 없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나중에는 사람들에게 붙들려서 온갖 고초를 겪으시고 상처투성이의 몸이 되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확신을 가졌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어. 그는 거짓말을 한 거였어.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람이 저렇게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는 건 말이 안 되잖아?’라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비참하게 죽는 것 보니 하나님께 벌을 받고 있구나. 도대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저렇게 십자가에 달려 갈기갈기 찢겨 죽는 거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초대 교회 사도들이 복음 전할 때 제일 큰 걸림돌이 되었던 게 바로 이 십자가였습니다. 메시야가 그렇게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는 건 이해가 안되었던 겁니다. 만약에 저렇게 힘 없는 메시야를 믿는다면 자신이 어려울 때 아무 도움도 못 줄 게 분명해 보였습니다. 아니 괜히 저런 메시야를 믿었다가 자기도 예수처럼 뭔가 안 좋은 일을 당할 것 같았습니다. ‘자기 앞가림도 못해서 저렇게 죽는 사람을 어떻게 믿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겁니다.
3. 왜 십자가?
1) 공의와 사랑
그렇다면 주님은 왜 그렇게 초라하고 상처투성이인 모습으로 오신 걸까요?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는 그 존귀한 메시야가 왜 그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오셔서 처참하게 십자가에 달려돌아가셨는지 설명해 줍니다. 우리 같이 4-5절을 읽어봅시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 말씀에 보면 우리의 라는 말이 계속 나옵니다. 우리의 질고, 우리의 슬픔, 우리의 허물, 우리의 죄악. 우리가 짊어져야 할 질고, 슬픔, 허물, 죄악을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셨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릴 형벌을 자기 아들에게 대신 내리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그냥 죄가 없는 걸로 해줄게 용서해 줄게 간단하게 용서해 주시면 될 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 아들이 대신 십자가에서 그 모든 것을 우리 대신 짊어지게 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냥 용서해 주셨다면 그건 공의롭지 않은 걸 겁니다. 우리 나라에 유행하는 말 중에 내로남불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죠.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심판을 내리십니다. 그냥 적당히 봐주고 넘어가 주신다면 하나님의 공의가 설 자리가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당연히 우리가 우리 죄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에 우리가 받을 고난을 자기 아들에게 대신 내리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같이 만났던 것입니다.
2) 나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서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사람들의 생각이 맞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징벌을 받고 있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원래 그 징벌은 우리가 받아야 할 징벌이었는데 주님께서 대신 그 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셔서 머리는 가시에 찔리고 날카로운 못에 손 발을 찔리고 창에 옆구리가 상한 것은 바로 우리의 허물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우리 대신에 징계를 받으셔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아 주셔서 우리는 나음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엄청난 죄를 지었기에 저렇게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징벌을 받지 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원래는 내가 받아야 할 징벌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신 거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대신 고난을 받고 죽으신 것을 잘 설명해 주는 단어가 있는데 바로 속건제라는 말입니다. 구약 시대에 속건제는 누군가에게 해를 입혔을 때 그것을 배상하고 하나님께도 죄 용서를 위해서 드리는 제사가 속건제였습니다. 속건제를 드릴 때는 양을 잡아서 양을 드리고 대신에 죄를 지은 사람은 용서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세례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속건제물인 양처럼 우리 대신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셔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1981년 3월 30일 힝클리라고 하는 청년이 미국 대통령 레이건을 향해 여섯 발의 총을 쏘았습니다. 그 즉시 경호원들이 대통령을 전용차에 밀어 넣었고 그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여섯 발 중의 한 발이 대통령을 막아섰던 경호원의 하복부에 명중하여 폐와 간을 관통하여 지나갔습니다. 물론 그때 방탄 차에 맞고 튕겨나온 총알 때문에 레이건도 부상을 입었지만 메카시 요원이 막아준 덕에 생명을 건졌습니다.
여러분! 경호원이 대통령 대신에 총알을 맞았다고 하면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만일 반대의 경우라면 어떨 것 같습니까? 대통령이 경호원에게 날아오는 총알을 대신 맞았다면 이게 말이 됩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온 우주의 먼지같은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세상의 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졌다는 것은 미스테리 중의 미스테리였던 겁니다.
다른 종교에서 신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심청전에도 보면 용왕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 심청이를 인당수에 던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거꾸로 자기 아들을 희생시켜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과 맞바꾼 존귀한 존재입니다. 부모님이 여러분을 인정해 주지 않았어도 사람들이 여러분의 외모나 가방끈을 보고 무시해도 그것 때문에 흔들리면 안 됩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생명을 걸고 구원해 준 너무나 소중하고 특별한 사람이다. 이게 여러분의 자존감의 근거가 되길 원합니다. 이런 당당함으로, 그리고 놀라운 은혜의 감격으로 기쁨의 삶을 살아가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3) 십자가의 길 따라가기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방법은 세상 사람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힘과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방법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죽고 자기가 고통 당하고 자기가 희생함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겁니다. 가장 약한데 거기서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작은 천국은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인 자기 희생의 길로 가는 누군가가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요즘 많은 분들이 눈물 흘리면서 보았다는 ‘폭삭 속았수다’라는 드라마를 보면 자녀를 위해서 고생하고 눈물 흘리고 마지막에는 병까지 얻어서 돌아가시는 부모님이 계십니다. 그렇게 희생하는 부모가 있기에 자녀들이 잘 자라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찬 바람 부는 주차장에서 누군가가 얼어붙은 손을 호호 불면서 주차 관리를 해 주셔서 우리가 편하게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또 누군가가 아픈 허리를 두드리면서 국수를 끓여 주셔서 우리가 맛있는 식사를 하는 겁니다. 어제도 많은 성도님들이 비를 맞으시면서 바자회를 여셨습니다. 그렇게 고생해서 올린 수익을 또 다른 이웃에게 흘려 보내는 작은 움직임이 이 어두운 세상에 조금이라도 빛을 비추게 되는 겁니다.
세상의 방식은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서서 내가 이겨야 행복한 삶이 온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여주신 방법은 내가 져 주고 내가 좀 손해 보고 내가 희생하는 곳에서 천국의 아름다운 질서가 생긴다고 말합니다. 저는 그렇게 주님의 길을 가는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의 가정이 작은 천국을 이루고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흘러갈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4. 십자가를 지신 결과
1) 죄 용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오늘 본문 11절 하반절 말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의 죄악을 담당하시고 대신에 그들을 의롭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이제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죄의 책임을 우리에게 묻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 다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심판 받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그런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문제 투성이인 우리를 향해서 두 팔 벌려 맞아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내가 죄의 결과로 어떤 어려움도 당하지 않는다는 말과 혼동하면 안 됩니다. 내가 돈을 함부로 낭비해서 가난해졌거나 방탕한 삶을 살다가 몸이 망가졌다면 그건 죄에 대한 심판이라기 보다 죄의 결과입니다. 내가 공부 안 해서 대학에 떨어졌거나 내가 남을 속인 것 때문에 법의 심판을 받는 건 하나님께 형벌 받는 게 아니라 내가 행한 행동의 결과인 것입니다.
2) 참 된 자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결과 중에서 또 중요한 것은 내가 참된 자유를 얻게 되었다는 겁니다. 우리 같이 12절을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좀 어려운 번역입니다. 좀 쉽게 말하면 이런 말입니다. 주님께서 전쟁에 참여하셔서 승리하시고 탈취한 것을 나누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전쟁에서 적에게 빼앗은 탈취물이 뭘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들입니다. 원래 마귀의 종으로 잡혀 있던 우리를 마귀에게서 빼앗아 왔다는 겁니다. 이제 마귀에게 사로잡혀 고통 받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고난과 승리를 통해서 참된 자유를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전쟁에서 승리한 주님이 귀환하실 때 끌려오는 적군 중 최고 앞에 서 있는 적군은 바로 죄와 죽음입니다. 주님께서 그것들을 정복하시고 우리에게는 참된 자유를 허락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병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고쳐 주셨는데 마지막에는 그 모든 뿌리에 있는 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건져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서 죽더라도 그게 완전한 멸망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있으며 천국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주님 앞에 설 때에 우리도 주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 주위에는 많은 구경꾼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주님의 죽음을 기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안타까워하고 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라고 하면서 안쓰러워하는 자리에 머물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그 고통이 나를 위한 고통이었고 그 십자가는 원래 내가 달렸어야 할 자리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고통 당해 주셨기에 우리는 죄 용서함을 받게 되었고 주님께서 십자가를 넘어서 마침내 마귀에게 승리하셨기에 우리는 죄와 죽음에서 건짐 받고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으로 인해서 죄 용서함 받고 자유를 얻은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참된 자유와 용서로 인한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모두가 주님께 받은 그 은혜와 사랑을 또 다른 누구에겐가 흘려보내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주님의 은혜로 충만하고 복음의 감격으로 충만한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