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연함&유연함

행 21: 1-26

들어가면서

요즘 젊은이들은 어떤 단어를 줄여서 말하는 걸 좋아합니다. ‘남사’는 남양사거리, ‘베라’는 베스킨라빈스, ‘빠바’는 파리바게트 이런 식입니다. 은동교가 은혜의동산기독교학교라는 건 왠만한 사람은 다 아는 줄임말일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겉빠속촉’은 뭔 지 아십니까? 예. 겉은 빠삭하고 속은 촉촉하다는 뜻입니다. 치킨이나 베이커리 같은 음식물의 바깥쪽이 빠삭빠삭한데 속은 촉촉하게 부드러울 때 ‘겉빠속촉’이란 말을 씁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도 겉빠속촉이 있다는 거 아십니까? 사람이 겉으로는 좀 딱딱해 보이고 말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막상 겪어보았더니 가슴이 따뜻한 사람일 때 ‘그 사람 겉빠속촉이야’ 이렇게 말합니다. 반대로 외유내강이란 말도 있죠. 겉으로는 굉장히 부드러운 사람 같은데 마음속 심지가 단단한 사람을 보고 외유내강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분들은 어느 한쪽 면 만을 보면 그 사람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부드러운 태도와 단단한 심지를 같이 봐야 이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울은 어떤 사람 같습니까? 그는 주위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하는데도 흔들리지 않고 사명을 감당하는 결연함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오해를 사지 않도록 정결 예식을 행하면 좋겠다는 야고보의 말을 듣고는 굳이 안 해도 되는 일인 걸 알면서도 자기가 직접 비용을 부담해서 정결 예식을 행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보면 결연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또 다르게 보면 매우 유연한 사람이었습니다. 결연함과 유연함은 정반대의 성품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들으면 마치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말처럼 뭔가 함께 하기 힘든 말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두 성품이 잘 어우러질 때 우리는 좀 더 성숙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중요한 건 결연할 때 결연하고 유연할 때 유연해야 한다는 거겠죠. 만약 이게 반대로 되면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를 만들어낼 겁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어떤 경우에 결연한 의지로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지, 반대로 어떨 때 유연하게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려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1. 결연함

1) 둘 다 성령께서 주신 마음인데?

먼저 바울의 결연함을 좀 봅시다. 바울이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가장 잘 보여준 건 지난 주일 말씀에 나온 행 20: 24일 것입니다. “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은 바울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기어이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그의 흔들리지 않는 결심을 보여준 말씀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결심을 알리고 에베소 장로와 헤어진 다음에 오늘 본문의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서 배를 타고 가다가 몇몇 지역에 잠시 내려서 그곳에 있는 성도들을 만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절에 보면 그가 두로에 내려서 7일간 머물렀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때 두로에 있던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권면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에 권면했다는 말은 헬라어 문법으로 살펴보면 그냥 한 번 말하고 끝난 게 아니라 계속해서 말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 사람이 계속해서 위험하니까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말렸다는 거죠.

11절에 보면 그가 가이사랴에 도착해서 빌립 집사의 집에 가 있을 때 아가보라고 하는 선지자가 와서 그에게 권면한 내용이 나오는데 아가보는 바울의 허리띠로 자기 수족을 잡아매면서 성령이 말씀하셨는데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줄 거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러자 거기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권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약간의 혼란을 겪게 됩니다. 분명 바울도 성령의 인도를 받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는데 또 다른 사람들이 성령께서 알게 해 주셔서 그가 결박된다고 하니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합니다. 같은 성령이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성령님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바울이 결박 당하고 환난 당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올라가지 말라고 한 건 자기들 생각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성령께서 결박 당하는 걸 알게 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라가야 한다고 하셨음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이게 다른 종교와 진정한 복음의 결정적 차이 중의 하나입니다. 요즘 우리 나라에서 점이 유행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방송에서 이런 걸 다루기도 하고 심지어 핸드폰에 점 집 앱이 여러 개 있는데 이용자가 수십만명에서 백만명이 넘는 앱이 몇개나 있다고 합니다. 유튜브 방송을 하는 사람도 굉장히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특별히 2030 세대가 이런 데 관심이 많아서 대학가 주변에 점집이 많이 생기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의 미래를 알려고 하는 이유가 뭘까요? 예를 들어 무당이 당신에게 큰 위기가 닥칠 거라고 한다면 그 사람의 가장 큰 반응이 뭘까요? 어떻게 하면 이 액운을 피할 수 있을까 하는 겁니다. 그때 무당이 이렇게 해라 라는 처방을 내리면 그 무당의 지시를 따름으로써 자기에게 닥칠 액운을 피해보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의 결연함은 그것과 결이 완전히 다릅니다. 당신에게 환난이 닥칠 겁니다. 그때 바울은 그걸 피하려고 하기 보다 그럴지라도 나는 이 길을 가겠습니다 라고 하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도의 삶은 바로 이런 겁니다. 편한 길, 꽃 길, 좋은 길로만 가는 게 아니라 주님이 원하는 길로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종교와 복음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그 중심에 내가 있는가 아니면 주님이 계신가 하는 겁니다. 종교는 그 중심에 자기가 있습니다. 나의 안전, 나의 건강, 나의 대박을 꿈꾸면서 미래를 알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복음의 중심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 주님이 원하는 삶을 살려고 하는 겁니다.

2) 주님이 걸어가신 길

우리가 주님 뜻을 알기 위해서 민감하게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민해야 할 게 있는데,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보면서 따라가야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할 때 베드로가 주님께 항변하면서 반대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에 나오는 항변했다는 단어는 화를 내면서 책망했다는 말입니다. 이게 뭐냐고 화를 내고 따졌다는 거죠. 그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시면서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의 항변 한복판에는 자신이 자리잡고 있었던 겁니다. 주님이 십자가 지시면 주님만 믿고 배도 버리고 그물도 버리고 따라온 자신은 뭐가 되나 라는 생각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국 주님도 그렇게 말리는 제자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십자가의 길로 가신 겁니다.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께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하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겠다고 하면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겁니다.

바울의 결연함도 여기서 나온 겁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이 항변하면서 말리는데도 기어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했던 것처럼 바울도 수많은 사람들이 말렸지만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완수하여 한 알의 밀알이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한 때 유행했던 줄임말 중에 중꺾마 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뜻이죠. 바울은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주위 사람들의 말 때문에 꺾이지 않았던 겁니다.

3) 십자가의 길을 간 사람들

이런 바울의 행동을 보면서 우리도 그렇게 죽음의 길 순교자의 길을 가야 하나? 아니면 이건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거지 우리는 그냥 주일날 교회 잘 나오는 정도만 하면 되나 라는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계시는 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바울만 그렇게 산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고보를 생각해 봅시다.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이미 예루살렘에는 헤롯과 사두개인들의 무지막지한 핍박이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그 와중에 제자들이 감옥에 갇혔다가 나온 경우도 있었고 스데반이나 또 다른 야고보는 순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엄청난 핍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엄청난 핍박 속에서도 예루살렘 교회를 지키면서 사역하고 있던 야고보 역시 순교적 삶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을 떠나지 못했던 이유는 그가 돌보고 섬겨야 할 많은 성도들이 예루살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역시 결연한 의지로 자기 사명을 감당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가 하면 빌립 역시 자기의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면서 20여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가이사랴에 정착한 빌립의 네 딸이 예언하는 자라고 하는 걸 보면 그가 그 세월동안 자기 자녀들을 믿음으로 양육하면서 전도자로 살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우리 눈에 잘 안 띄지만 소중한 역할을 한 사람이 있는데 바울이 가이사랴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 때 그와 동행했던 사람들 중에 나손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울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가서 자기 집에 머물게 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붙들리고 환난을 겪어야 할 사람인 걸 알면서도 자기 집에 바울을 모신 나손 역시 자기가 바울 때문에 피해를 볼 거라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자기 집을 오픈한 나손 역시 십자가의 길을 걷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들 모두 그리스도께서 보여준 말할 수 없는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었고 그 은혜 때문에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이었던 겁니다.

4)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게 성도의 삶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가길 소망합니다. 직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회식 자리에 안 가면 왕따될 것 같고 거기서 술 주고 받는 것 거절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평소에 다른 분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게 쉽지 않습니다. 이때 잊지 말고 기억할 게 있습니다. 내 삶의 중심에 내가 있으면 그냥 평범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내 삶의 중심에 주님이 계시면 그 사람 때문에 주님이 드러날 것입니다.

가정에서 자녀를 양육하는 것도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겁니다. 단지 힘들기 때문에 십자가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자녀를 엄마 아빠의 욕심에 맞추는 대신에 이 자녀가 하나님의 아들 딸로 자라게 하려면 내 욕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대신에 정말 이 아이가 일평생 하나님 섬기는 아이로 자라가도록 위해서 기도해 주고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아이를 의대 보내기 위해서 1학년 때부터 의대반에 넣는 걸 보고 흔들리면 안 됩니다. 결연함을 가지고 흔들리지 않고 같이 그 길을 가는 겁니다. 이게 성도의 삶입니다.

2. 유연함

1)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이 무너짐

두 번째로 유연함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이나 주위 사람들이 그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결연한 모습으로 주님 따라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나 유연하게 주님 뒤를 따라갔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러 경로를 거쳐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실제적 지도자였던 야고보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역사적인 만남을 가질 때 두 사람만 만난 게 아니었습니다. 바울 일행과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이 같이 만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바울은 지금까지 자기가 선교한 결과를 보고했습니다. 19절에 보면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한 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현장에서는 꽤 긴 시간 보고를 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신 일을 낱낱이 말했다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은 그 보고를 듣고 비아냥거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선교 보고를 마치자 이번에는 야고보가 말했습니다. 20절 봅시다.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야고보의 말에 의하면 유대인 중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수만 명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짧은 시간에 이방인은 이방인 대로 유대인은 유대인 대로 많은 열매가 맺혀 많은 그리스도인이 생긴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소개되지 않았습니다만 이 자리에서 바울은 그 동안 마게도냐와 아가야 같은 이방 지역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준비한 구제 헌금을 전달했을 겁니다. 복음이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에게 이방 교회는 영적인 빚을 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구제 헌금을 모아서 보낸 겁니다. 사실 돈을 주는 것도 잘못하면 상대방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고 정말 감사해서, 그리고 사랑해서 전달되도록 기도하면서 헌금을 전했던 겁니다.

당시에 유대인과 이방인은 물과 기름처럼 절대로 하나 되기 어려운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이 두 그룹이 각기 놀라운 부흥을 경험한 겁니다. 각기 부흥을 경험한 두 그룹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의 일하심에 감동했던 것입니다. 그 동안 그들 사이에 있었던 큰 벽이 무너져 내린 겁니다.

2) 유대인의 오해 불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분위기를 잘 아는 야고보가 생각할 때 걱정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바울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는 부분이 있었는데 바울이 모세를 배반하고 율법을 못 지키게 하려고 한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오해할 만한 부분이 분명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이 할례를 행하거나 율법을 지켜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고 계속해서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문제 때문에 사도행전 15장에서 예루살렘 공회가 열리기도 했고 그때 예루살렘 교회도 바울의 입장을 지지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바울은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하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이 우리의 노력, 율법 준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쓴 여러 권의 성경에 보면 진짜 주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것을 진심으로 경험한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때 바울이 율법 폐기론자라고 오해를 받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사람들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 바울이 결례를 행하면 어떻겠느냐고 한 겁니다. 그가 이방 지역을 오래 다녔고 그것 때문에 뭔가 율법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부정한 것에 오염되었을 것 같다고 보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 정결 예식을 행해서 그가 율법 폐기론자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 좋겠다고 한 겁니다.

바울 입장에서는 굳이 그렇게 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걸 못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게 유대인들의 문화라면 기꺼이 그렇게 해서 불필요한 오해를 풀려고 한 겁니다. 바울의 이런 마음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 19-23절 말씀입니다. 우리 같이 읽어볼까요?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바울은 진리에 대해서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말려도 결연하게 그 길을 갔습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양보하고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바울이 이렇게 아름다운 하나됨을 만들어 내고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막힌 담을 허물 수 있었던 것은 복음을 위하여 자기들의 틀을 깨고 보다 유연한 자세로 서로를 용납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볼 때 좀 더 유연한 눈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어른 세대가 젊은 세대를 볼 때 너무 철 없어 보이고 개념 없어 보이지만 유연한 눈으로 그들을 품어야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하고 다른 사람들, 다른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을 대할 때 보다 유연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오랜 세월 단일 민족임을 자랑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와 다른 사람을 볼 때 굉장히 불편한 마음이 많습니다. 그들의 복장, 그들의 음식 문화 같은 것이 정말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것처럼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얼마든지 그들을 용납하고 심지어 그들과 같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우리 주님의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마리아의 배에서 10달을 거꾸로 선채로 계셨습니다. 사람들이 당하는 모든 고난을 다 겪으셨습니다. 사람 비슷한 행동을 하신 게 아니라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기꺼이 낮은 자리로 내려가셔서 그들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주일 학교 교사를 하는 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청소년을 지도하는 선생님들은 그들의 눈높이에 자신을 맞추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분명 국밥을 좋아하지만 아이들을 위해서 피자를 드셔야 합니다. 초등부 선생님들은 초등부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셔야 합니다. 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분반공부를 진행해야 합니다. 사회에서 점잖은 일을 하는 분들이 어린 유아부, 유치부 아이들처럼 팔짝팔짝 뛰면서 율동을 하셔야 합니다. 이게 우리에게 필요한 유연함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한편으로는 결연한 마음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유연함으로 모든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자리에 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결연하게 십자가를 지셨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주님 가신 그 길로 따라가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