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 사는 인생
창 9: 18-29
들어가면서
새로 차를 산 사람은 행여나 긁힐까 봐 굉장히 조심조심 합니다. 그래서 자동 세차도 안 하고 손 세차를 하면서 조심조심 차를 관리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끼는 내 새 차를 누군가가 확 긁고 가면 엄청 마음이 아플 겁니다. 새로 옷을 사서 기분 좋게 입고 나갔는데 밥 먹다가 김치국물이라도 튀면 괜히 더 속상합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새로 결혼한 부부는 정말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어합니다. 그러다가 첫 부부 싸움을 하고 나면 이게 뭔가 싶을 겁니다. 뭔가 새롭게 출발할 때는 좀 더 잘 하고 싶은 마음이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뭔가 새롭게 시작할 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훨씬 더 아프게 다가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노아 홍수 이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제 악한 세대는 지나가고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방주에서 살아남은 8명은 단순한 생존자가 아니라 이제 새로운 세상을 시작해야 할 중요한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8명 모두의 마음속에 계속해서 좋은 일만 일어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아주 어두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노아는 술에 취해서 벌거벗고 있었고 그의 아들이었던 함이 그걸 보고 다른 형제들에게 뒷담화를 했습니다. 그걸 안 노아가 함의 아들인 가나안을 저주했습니다.
만약 오늘 본문이 없고 노아와 그의 가족이 살아남았고 하나님이 무지개를 보여주면서 새롭게 언약을 맺어준 장면으로 노아 이야기가 끝났으면 참 좋았을 텐데 성경의 저자인 모세는 굳이 별로 아름답지도 않고 행복해 보이지도 않는 이 이야기를 넣어서 우리로 하여금 약간의 불편한 마음과 질문이 생기게 합니다. 왜 성경은 이 이야기를 숨기지 않고 우리에게 전해주는 걸까요?
1. 노아에게는 여전히 은혜가 필요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첫번째 떠오르는 질문은 창세기 6: 9에서 노아는 의인이고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했는데 그런 의인이고 완전한 자라고 했던 노아가 어떻게 술에 취해서 추태를 부렸는가 하는 겁니다. 사실 이건 잘 생각해 보면 우리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 받았고 우리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그런 고민이 생기는 겁니다. 왜 나는 여전히 죄를 짓고 또 악한 생각을 하지? 내가 진짜 의인 맞나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꼭 알아야 될 게 있는데, ‘우리가 의인이 되었다’라는 말은 법정적 선언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살인을 저질러서 무기징역 선고를 받고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대통령 특사로 풀려났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 사람은 이제 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됩니다. 아무도 그를 다시 교도소로 집어넣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이 한 나쁜 행동이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피해자 가족들에게 죄송한 마음을 갖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의인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받을 죄의 형벌을 면해 주셨다는 측면에서 우리가 의인이라는 겁니다. 더 이상 그 죄 때문에 지옥 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안에 있는 죄의 흔적까지 다 사라졌다는 말은 아닙니다. 의인은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로 용서 받은 사람입니다.
밀양이라는 영화에 보면 남편을 먼저 보내고 어린 아들 하나 키우는 여인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렇게 아끼던 아들이 유괴되어 죽임을 당합니다. 너무나 절망하던 주인공이 교회에 나가면서 마음의 평정을 찾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교도소로 갑니다. 그런데 자기 아들을 죽인 범인이 자기는 이미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고 할 때 피해자 어머니가 폭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황당한 범인은 자기의 죄에 대한 책임을 면제 받은 것과 자기가 저지른 죄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혼동하고 있었던 겁니다.
다시 노아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노아가 의인이었다는 말은 아무 잘못도 없고 완벽하게 의롭게 살았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여겨 주신 그 은혜 때문에 그가 구원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구원 받은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납니다. 이 때부터 성령께서 그 사람 마음에서 실제로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그러나 그 새 생명은 완성된 상태가 아닙니다. 계속해서 자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죄와 싸우고 때로는 넘어지기도 합니다. 주님 안에서 거듭난 사람은 더 이상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죄의 잔재와 싸우게 됩니다. 노아의 경우 죄가 여전히 그의 삶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고 그 약함이 드러난 사건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장면입니다.
노아에게 은혜가 계속 필요했던 이유는 그가 아직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새 생명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새 생명은 스스로 자라지 않습니다. 은혜라는 햇빛과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금방 시들어 버립니다. 그는 여전히 은혜라는 햇빛을 받아 계속해서 죄와 싸워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그런 존재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고 죄 용서 받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났지만 여전히 우리 속에서 죄의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내 스스로도 실망할 만큼 죄 가운데서 헤맬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죄의 유혹을 전혀 받지 않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죄의 본질을 깨닫고 그것과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전쟁터'로 부름 받은 사람이 된 겁니다.
노아의 방심은 우리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노아에게는 홍수에서 구원 받았던 가장 큰 영적 승리 직후가 가장 위험한 때였습니다. 우리가 '의인'이라는 법정적 선언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의 잔재와 싸우는 이유는 우리가 '은혜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서 있을 수 없는 존재'임을 뼛속 깊이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노아의 벌거벗음은 그의 수치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의 옷이 아니면 결코 가려질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영적 상태를 보여줍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신 사람이니까 주인 되신 예수님의 뜻을 따라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답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 닮은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거죠. 이것은 한 순간에 되는 게 아니라 주님 나라 갈 때까지 평생 변화되어가야 하는 겁니다. 이렇게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성화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 받은 것은 은혜로 된 것이고 성화는 내가 노력해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지나 우리의 결심은 그걸 가능하게 할 만큼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 받고 의롭게 되는 과정에서 주님의 은혜로 된 것처럼 성화를 위해서도 주님의 은혜가 있어야 함을 깨닫고 주님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약함을 고백하고 주님께서 도와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구원 받은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에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영광스러운 존재가 될 걸 바라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의 은혜 안에서만 내가 변화될 수 있음을 고백하고 주님 바라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 22-24절에서 이렇게 고민을 토로했습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자기 안에서 두 마음이 싸우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바울이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울부짖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죄에 지배당하는 패배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 새 마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죄와 싸운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우리 안에 다른 생명이 들어와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습니다. 노아에게는 여전히 은혜가 필요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도 이런 고백을 해야 합니다. 나는 주님의 은혜로 의롭다 함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여전히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고백하면서도 ‘내가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 끊임없이 주님의 은혜를 붙들고 자기 안에 있는 죄악 된 생각들을 죽여 나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인으로서 당당함을 가짐과 동시에 주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죄와 싸우는 치열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죄 사함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미 새로운 생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넘어질 수 있지만 주저앉지는 않습니다. 죄와 싸우는 그 자리에서조차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계속 일하고 계십니다.
2. 함의 가장 큰 문제는 은혜를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생기는 질문은 함이 아버지 뒷담화 좀 한 게 그렇게 큰 죄인가 하는 겁니다. 아버지 뒷담화 했다고 함의 아들인 가나안을 저주한 노아의 행동이 좀 과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만일 이런 잘못을 한 사람이 저주를 받는다면 여기 있는 우리 누구도 그 엄청난 저주를 피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식들끼리 모여서 우리 아버지 왜 그러신데 진짜. 이 정도 이야기 여러분도 하시지 않습니까?
사실 함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가 경험한 은혜를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노아도 마찬가지였지만 함 역시 하나님 앞에서 완벽한 의인이기 때문에 방주에 오를 수 있었던 게 아닙니다. 그 역시 많은 연약함과 부족함, 죄악 된 모습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방주를 탔고 홍수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으면서 어느 새 자기가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을 비웃고 정죄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사람은 비판적 우월감을 갖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스스로 의인의 자리에 선다는 것입니다. 함은 아버지의 수치를 보고 아버지를 비웃으면서 형제들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처럼 저급하게 취하지 않았어 라는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 예수님께서 들려 주셨던 한 비유가 생각납니다. 어떤 사람이 일만 달란트 빚을 졌었는데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돈을 빌려 준 주인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그의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 빚 진 자를 만나서 감옥에 넣고 다 갚기 전에는 못 나온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입니다. 100 데나리온이라고 하면 100일치 품삯입니다. 만일 요즘 하루 일당을 10만원이라고 한다면 100데나리온은 약 1,000만원 쯤 되는 돈입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입니다. 1만 달란트는 6천만 데나리온입니다. 그럼 10만원 일당을 6천만 번 받는 거니까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약 6조원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자기는 6조원 정도나 되는 어마어마한 돈을 탕감 받은 사람이 1,000만원 빚진 사람을 감옥에 넣은 겁니다. 이 사람의 가장 큰 문제가 뭡니까? 자기가 받은 은혜를 잊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함은 아버지의 잘못을 비난할 자격이 없었습니다 만일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정죄했다면 그는 방주에 오를 수도 없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약함과 부족함을 덮어 주시고 의롭다고 여겨 주셔서 방주에 올랐다면 자기 역시 그런 마음으로 아버지를 보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수치를 드러내는 사람은 사실 자기 의를 그 위에 세우고 있는 사람입니다. 함의 행동은 단순한 뒷담화가 아니라 아버지를 비난함으로써 자기가 의로운 사람임을 드러낸 것이고 상대적인 우월감을 가졌던 겁니다. 그리고 은혜 대신 비교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창세기 최초의 독자였던 모세 시대 사람들에게도 큰 울림을 주었을 겁니다. 그들은 기적적으로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를 건넜습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애굽의 노예가 아니라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나 빨리, 그리고 너무나 자주 그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걸핏하면 원망하고 걸핏하면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원망 자체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그들이 은혜를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소망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 말을 패러디 한다면 **‘은혜를 잊은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도 너무나 자주 다른 사람을 욕하고 비난하고 손가락질 하지 않습니까? 요즘 텔레비전 프로나 유튜브 채널 같은 곳에 보면 다른 사람의 잘못을 들춰내는 프로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걸 보면서 다른 사람들을 욕하는 경우가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면서 나는 저렇게 살지 않아. 나는 저 사람보다 훨씬 더 의로운 사람이야. 이렇게 스스로 만족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가짜 의입니다. 은혜를 잊은 도덕주의자는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구경거리로 삼습니다. 그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게 뭡니까? 자기도 은혜가 없으면 똑 같은 사람이고 더 한 사람일 수 있다는 겁니다.
특별히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의 잘못을 들춰내고 뒷담화 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었는데 나는 주님으로부터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이다. 나는 감히 100 데나리온 빚진 자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 그걸 고백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해결책 십자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생기는 질문은 왜 가나안에게 이렇게 치명적인 저주를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함이 아니라 가나안이었나부터 생각해 봅시다. 사실 가나안이 셈과 야벳의 종이 된다는 저주는 함의 아들인 가나안 한 사람에게 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의 후손에게 한 저주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의 후손이 곧 함의 후손이니까 가나안을 저주 한 거나 함을 저주한 거나 그게 그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함의 후손이든지 가나안의 후손이든지 결국 모두 다 노아의 후손 아닙니까? 노아는 그냥 따끔하게 혼내고 말지 이렇게 자기의 후손이기도 한 가나안을 저주했을까요?
사실 이 구절을 이상하게 해석해서 함의 후손은 흑인이고 셈의 후손은 황인종이고 야벳의 후손은 백인종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건 한 마디로 말도 안 되는 해석입니다. 가나안의 후예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입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그들도 황인종들이었습니다. 인종으로 해석한 건 백인들이 노예 제도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만든 말도 안 되는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왜 가나안에게 이런 저주를 했을까요? 이건 혈통적으로 가나안 자손이 그런 저주를 받는다고 하기 보다 은혜로 살지 않고 자기 의로 사는 사람, 은혜 대신에 남을 비난하고 자기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삶의 종말은 그런 삶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것 같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우리 모두가 함처럼 살고 있습니다. 가나안에게 임한 저주는 사실 우리에게 임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수치를 덮었습니다. 셈과 야벳의 모습은 우리가 되어야 할 모습이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를 대신해서 오실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셈과 야벳이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 주었던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의 허물을 덮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수치를 덮기 위해서 특별히 대가를 치르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수치를 덮기 위해서 자신이 십자가 위에서 벌거벗긴 채로 매달려서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벌거 벗겨지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다시는 벌거벗은 자로 서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함처럼 누군가를 정죄하고 싶을 때, 혹은 노아처럼 내 자신의 연약함에 절망할 때 우리는 다시 골고다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거기서 나의 모든 수치와 저주를 뒤집어 쓰신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수치를 다 뒤집어 쓰셨기 때문에 우리의 수치가 덮였습니다. 주님께서 온갖 부끄러움을 당하시고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함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 가나안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저주를 우리에게서 거두어서 아들에게로 옮기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은혜로 사는 사람을 돕는 도구가 아니라 은혜로 살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살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야 할 저주를 아들에게 옮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은혜로 삽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노아처럼 넘어지기 쉽고 함처럼 교만하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이유는 우리의 연약함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크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의 저주가 우리에게 임해야 했으나 하나님은 그 저주를 십자가의 아들에게 옮기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수치 속에 살지 않습니다. 은혜라는 옷을 입고 다시 일어나 셈과 야벳처럼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는 은혜의 가족으로 살아 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시작했고 은혜로 붙들림 받고 은혜로 완성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끝까지 우리는 은혜로 사는 인생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새해를 맞는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