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명적인 죄의 결과
창 3: 8-24 / 304
들어가면서
이전에는 우리 나라가 마약 청정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마약이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청소년들에게까지 퍼지고 있습니다. 한국 마약 퇴치 운동 본부의 통계를 참고하면 2024년 기준 초중고생 마약 사범이 10년 전보다 20배 이상 폭증하고 있다고 합니다. 보통 마약은 잠깐의 호기심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폐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마약은 뇌의 보상 체계를 교란시켜 반복적으로 복용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상황을 만듭니다. 처음에는 쾌락을 위해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마약하지 않으면 너무 고통스러워서 또 다시 마약을 찾게 된다고 합니다. 간, 심장, 뇌 손상은 물론이고 면역력 저하, 체중 급감을 동반하고 환각과 망상, 우울증과 불안증을 동반합니다. 자기 통제력이 무너지고 심한 경우 호흡 정지나 심장 마비로 즉사할 수 있습니다. 요즘 미국과 중국 사이에 무역 분쟁까지 번지게 한 펜타닐이란 마약은 단 한 번만 경험해도 심각한 중독에 빠지게 되는데 결국에는 거의 좀비처럼 기어 다니게 됩니다.
마약의 폐해는 한 사람에게 국한 되지 않고 모든 가족은 물론이고 국가에까지 미치게 됩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마약에 빠지면 가족 간 신뢰가 깨지고 온 가족들이 지옥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약을 살 돈을 구하기 위해서 절도, 사기, 폭력 등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고 마약을 판 자금이 조폭이나 범죄 단체로 흘러 들어가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국가적으로도 엄청난 손해를 입게 됩니다.
시작은 호기심이나 잠깐의 쾌락을 위한 것이지만 그 결과는 너무 치명적입니다. 처음 호기심에 마약에 손을 댈 때 그 사람들이 그 결과가 이렇게 치명적인 생각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저는 이것이 죄의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죄를 지을 때는 호기심, 욕심, 쾌락 같은 것 때문에 죄를 짓지만 그 결과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치명적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죄를 너무 가볍게 생각합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남들이 죄라고 해도 내 생각에는 아니야라고 하면 그게 죄가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옛날에는 동성 연애자들이 몰래 숨어 있었다면 그게 왜 나쁜 거냐고 당당히 주장하면서 행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대표적인 사람이 니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기독교의 도덕을 노예 도덕이라고 불렀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힘, 용기, 주도권을 강조했는데 기독교에서는 겸손, 순종, 희생을 강조하는데 이건 사람들을 약자로 만드는 노예 도덕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도덕적 가치를 창조해야 하고 이걸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초인, 즉 슈퍼맨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죄는 더 이상 죄가 아닙니다. 신이 죄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인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한 말과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니체가 누군지 몰라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죄를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 안에서도 죄를 가볍게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교리를 남용해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죄를 좀 짓더라도 어차피 다 용서해 줄 것이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구원파 같은 사람들이죠. 이런 주장들은 죄를 가볍게 생각하게 만듦으로써 쉽게 죄에 발을 담그게 만듭니다. 그런데 쉽게 죄에 발을 담그는 사람들이 그 죄의 결과가 얼마나 치명적인가는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절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가 벗었으므로 두려워서 나무 사이에 숨었다고 하자 하나님이 다시 묻습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하였느냐? 하나님은 계속해서 물어보셨습니다. 몰라서 물어보신 게 아닙니다. 다 아시고 물어보시는 겁니다. 마치 범죄자의 죄를 낱낱이 알고 있는 판사가 피의자의 죄상을 드러내기 위해서 질문하는 것처럼 물어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그의 죄를 밝혀 내실 뿐만 아니라 그 죄에 대해 엄중한 심판을 내리셨습니다.오늘 본문은 죄를 가볍게 생각하고 죄에 발을 담그는 사람들에게 죄의 결과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오늘 이 장면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만일 죄의 결과가 이렇게 치명적이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굳이 십자가를 지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잠깐 실수한 것 때문에, 잘 모르고 어쩌다 한 일 때문에 십자가에서 갈기갈기 찢겨서 돌아가신 게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겪어야 할 치명적인 죄의 결과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우리 대신 돌아가셨습니다. 내 죄 때문에 주님을 죽게 만들어 놓고 다시 죄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죄를 짓는 것은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죄가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가지고 오는지 알고 죄와 싸워 이기는 삶을 살도록 주님께 기도하고 죄가 들어올 수 있는 빈틈이 없는지 스스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1. 죄의 치명적 결과
도대체 죄의 결과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같이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후 바로 죽지 않았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에는 3가지가 있습니다.
1) 영적인 죽음
첫째는 영적인 죽음입니다. 영적인 죽음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꽃을 꺾어서 화병에 꽂아두면 그 꽃은 보기도 좋고 향기도 좋지만 사실은 죽은 꽃입니다. 사람들이 멀쩡히 걸어 다니고 명문 대학도 나오고 좋은 직장을 다녀도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면 그건 영적으로 죽은 겁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질문하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물어보신 것이 아닙니다. 이 질문은 지금 아담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물어 보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기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물어보신 것입니다. 너 지금 나와의 관계를 끊고 너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데 지금 네가 어떤 자리에 서 있는지 아느냐? 물어보신 겁니다. 그 때 아담이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우리 같이 10절 읽어봅시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여기에 보면 아담의 마음속에 담긴 두 가지 중요한 감정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수치심이고 하나는 두려움입니다. 아담은 자기가 벗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7절 말씀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자기들이 벗었다는 것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처음 두 사람을 만들었을 때 그들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난 후 에덴 동산에 두 사람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수치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죄는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가져다 줍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 보면 라스콜리니코프라는 대학생이 전당포 노파를 살해합니다. 그는 자신을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가난으로 고통 당하고 있는데 전당포 노파는 가난한 사람들의 물건을 헐값에 팔아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분노합니다. 저런 악한 사람 하나를 죽여서 수많은 선을 행할 수 있다면 좋은 일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보통 사람은 법을 따라야 하지만 위대한 사람은 법을 초월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런 위대한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살인을 저지릅니다. 그런데 그는 살인 후 곧 바로 엄청난 수치심을 갖게 됩니다. 거리를 걷다가 아무 이유 없이 쓰러지기도 했고 수많은 사람들의 눈이 자신을 바라볼 때 마치 자신을 정죄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는 도망치지 못하고 양심의 법정에 갇히게 되었던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느꼈던 처음 감정이 바로 수치심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차마 하나님을 마주 대할 수 없어서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사람 사이에도 누군가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나면 그 사람 얼굴을 제대로 못 쳐다 봅니다.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는 이런 두려움 가운데 빠지게 되었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네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 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걸 생각하는 순간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결국 그들은 도저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어서 나무 그늘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그들에게 하나님은 죄의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그 형벌의 시작은 고통이었습니다. 먼저 하와에게는 해산의 고통을 더하게 하셨습니다. 새로운 생명을 낳는 일은 너무 감격적이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 기쁨이 고통과 두려움으로 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인간을 만드신 다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했습니다. 생육과 번성은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하지만 인간에게 주신 놀라운 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놀라운 복이 오히려 고통으로 바뀐 것입니다. 여성들이 일생동안 겪는 수많은 어려움 중에서 다른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이 있다면 바로 해산의 고통일 것입니다. 하늘이 노래지고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은 고통의 원인이 바로 죄 때문입니다. 하와가 지은 죄 때문에 수많은 여인이 해산의 고통을 당하게 된 겁니다.
두번째 고통은 노동의 고통입니다. 원래 노동은 즐겁고 신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에덴 동산을 가꾸고 자기가 가꾼 나무 열매를 맛있게 먹으면서 행복을 누렸어야 했는데 범죄한 이후 인간은 가시와 엉겅퀴를 걷어내야만 겨우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노동의 즐거움이 노동의 고통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또 한 가지 고통은 관계의 고통이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던 아담과 하와가 서로 남 탓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고 물으시자 아담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주어서 먹었다고 대답했습니다. 하와를 그 여자라고 부르면서 자기의 책임을 하와에게 미루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와를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까지도 원망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 사이가 완전해 깨진 겁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주도권을 놓고 다투게 되었습니다. 16절 하반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이 말은 해석하기 참 어렵습니다. 남편을 사모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좀 알기 쉽게 번역하면 남편은 너를 다스릴 거고 너는 남편 다스리기를 사모할 거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공동 번역에서는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약점을 보완해 주고 서로를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살았어야 했는데 거꾸로 서로가 서로를 다스리려 하면서 관계가 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니까 수치심과 두려움이 밀려오고 사람과의 관계도 깨지고 자연과의 관계도 깨지게 되면서 고통 속에 빠져 들게 된 것입니다.
2) 육체적 죽음
두번째 죽음은 육체적 죽음입니다. 우리 같이 19절을 읽어봅시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19절에 두 번 반복되는 말이 나옵니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아담을 만들 때 흙으로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 넣어서 생명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생기를 거두어 가시면 원래 재료였던 흙만 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이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것, 이게 육체적 죽음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지 않는 길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더 좋은 약을 만들고 더 좋은 건강 식품을 먹으면 죽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몸부림칩니다만 어느 누구도 이 죽음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아무리 부자였어도,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었어도 결국 죽음이라는 문턱을 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얼마 전 뉴스에 보니까 시진핑과 푸틴이 중국의 전승 80주년 기념 열병식에 참여했다가 만나서 몰래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때 마이크가 켜져 있어서 그 대화 내용이 방송사 생중계 음성에 그대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때 그들이 나눈 대화는 이번 세기 안에 인간이 150세까지 사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엄청난 권력을 쥐고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그들의 이 권세를 영원히 누리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 그들도 육체의 죽음을 절대로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죽음이라는 말을 할 때는 바로 이 육체적 죽음만 떠올립니다. 그런데 이런 육체적 죽음의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끊어진 영적 죽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연 날려 보셨습니까? 연을 제대로 날리면 하늘 높이까지 올라갑니다. 그런데 만일 연이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해 봅시다. 나는 더 높이 날고 싶은데 연줄 때문에 날 수가 없어. 이 연줄을 끊어버리면 하늘 높이 날텐데..... 그렇게 생각하고 연줄을 끊으면 어떻게 될까요? 하늘 높이 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냥 땅 바닥에 떨어질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진 인간은 잠시 하늘을 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땅 바닥에 떨어져 죽게 된다는 겁니다. 이 죽음이 어디서 온 것입니까? 바로 죄의 결과입니다.
3) 영원한 죽음
그런데 이 두 가지 죽음보다 더 심각한 죽음이 있습니다. 바로 영원한 죽음입니다. 영적인 죽음의 상태에서 다시는 회복되지 못하는 것이 영원한 죽음입니다. 오늘 본문에 24절 읽어봅시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결국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에덴의 풍성한 삶을 잃어버리고 이제는 땅을 갈고 가시와 엉겅퀴를 걷어내면서 농사지어야 먹고 살 수 있는 형편이 된 겁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치명적인 게 뭔지 아십니까? 이제 다시는 생명 나무를 먹기 위해서 에덴 동산에 들어갈 수 없도록 그룹들, 즉 천사들과 두루 도는 불 칼로 지키게 하셨습니다.
다시는 생명 나무 열매를 먹을 수 없다는 말은 다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영적인 죽음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영적으로 살아날 수 있습니다. 또 주님 다시 오시는 날 다시 육체도 부활하게 되면서 육체적 죽음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건져 내시기 위해서 보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거부하고 믿지 않으면 영원한 죽음의 자리에서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영원한 죽음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영원히 회복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상태를 지옥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도 지옥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를 들어 보셨을 겁니다. 계속해서 뜨거운 불로 지지고 온 몸을 잡아 비트는 고문을 하고 똥물에 잠수를 시키고 콧구멍에 마늘을 박는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어 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런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다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죄로 인해서 아담은 영적인 죽음, 육체적인 죽음, 영원한 죽음의 나락으로 추락하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죄가 던진 영향력 때문에 우리도 그 고통 속에서 이 땅에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죄의 결과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죄로 인한 고통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죄를 지을 때에도 이와 같이 치명적인 고통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은혜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다 보면 하나님께 반역하다가 완전히 망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은혜의 손을 내미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1) 가죽 옷
2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말이 나옵니다. 원래 아담과 하와는 범죄한 이후에 무화과 나무 잎으로 그들의 수치를 가렸습니다. 그런데 무화과 나무 잎은 금방 말라 버려서 그들의 수치를 제대로 가려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죽 옷을 지어서 입혀 주셨습니다. 그런데 가죽 옷을 만들려면 양과 같은 짐승을 잡아야만 합니다. 다시 말하면 양의 피를 흘리고 그 가죽으로 그들에게 옷을 입혀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완전히 죄의 형벌 가운데 떨어진 그들에게 한 가닥 희망을 선물하신 것입니다. 앞으로 오실 예수님께서 어린 양처럼 피를 흘리시고 그 주님의 은혜를 힘 입을 때 죄의 결과로 인한 수치를 가릴 수 있게 해 주시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2) 여자의 후손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 같이 15절 말씀 읽어봅시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뱀에게 형벌을 내릴 때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뱀과 여자가 원수가 될 거고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도 원수가 될 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은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거라고 했습니다. 얼른 읽으면 이 말씀은 아! 그래서 사람들이 뱀을 싫어하는구나. 뱀은 자꾸 사람의 발꿈치를 물고 사람들은 뱀을 잡으려고 머리를 밟는구나 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님이 뱀의 배후에 있는 사탄의 머리를 밟고 승리하게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분명 에덴동산에서 사탄의 꾀임에 넘어간 인간이 치명적인 죄의 결과를 맞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마침내 악한 사탄의 머리를 밟으시고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 사탄이 예수님의 발꿈치를 문 사건이라면 예수님이 죽음의 권세를 누르시고 부활하신 것은 사탄의 머리를 밟으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승리하신 이 사건은 우리가 그 주님의 은혜를 힘입을 때 우리도 사탄에게 승리할 수 있고 죄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롬 16: 20 상반절에서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의 머리를 밟으신 것처럼 이제는 성도들도 사탄의 머리를 밟을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죄의 결과가 치명적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그 치명적인 결과를 뒤집을 만큼 엄청난 은혜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우리의 죄가 훨씬 더 치명적인 것이며 이런 우리를 위해서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애굽에서 벗어나 광야로 온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광야 생활이 힘들다고 다시 지옥 같았던 애굽의 노예로 돌아가고 싶다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 치명적인 죄의 결과에서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또 다시 죄의 자리 근방에서 어슬렁거린다면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는 사람처럼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분명합니다. 우리에게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주님을 의지하고 죄와 싸워서 승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 죄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죄를 다스릴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