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창 13: 5-18/ 425
들어가면서
1) 선택의 중요성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어떤 선택은 우리 인생에 특별한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 고민하면서 선택하지만 그 선택이 우리의 삶에 무언가 대단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선택은 우리 인생에 너무나 큰 영향을 미칩니다. 누구와 결혼할 건지, 어떤 대학에 진학할 건지, 어떤 직장에 들어갈 건지 결정하는 것이 우리의 10년 뒤, 20년 뒤의 살을 결정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양쪽에 강도 두 명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둘 다 십자가에 있었고 죽음이 임박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한 강도는 예수님에게 욕을 했습니다. 네가 진짜 그리스도라면 너도 살고 우리도 살려봐라. 그런데 반대 쪽에 있던 강도는 전혀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욕하던 강도를 책망하면서 우리는 마땅히 죽을 짓을 했지만 이 분은 아무 죄가 없는데도 이런 고통을 당한다고 하면서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은 지옥에 떨어졌겠지만 다른 강도는 주님께서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짧은 시간의 선택이 두 사람을 낙원과 지옥으로 갈라놓았던 겁니다.
2) 본문의 배경
오늘 본문에는 두 사람의 선택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롯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이들의 선택을 보면서 앞으로 우리는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어떤 선택을 할 건지 잘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롯과 아브라함이 서로 불편한 어떤 상황을 맞게 된 것을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가축들이 점점 늘어나게 되자 그 가축들을 먹일 풀이 모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롯의 종들과 아브라함의 종들이 서로 자기 짐승들에게 풀을 더 먹이려고 하다가 싸우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 말씀에 보면 가나안 땅에 기근이 찾아와서 아브라함이 결핍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간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반대로 너무 풍요로운 것 때문에 불편해진 이야기가 나옵니다. 참 아이러니 하게도 너무 가난한 것도 힘들지만 너무 부요해져도 힘든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집에 사는 아이들이 과일 한 조각 더 먹으려고 싸우는 것처럼 재벌 집 자녀들은 더 많은 재산을 가지려고 싸우게 됩니다. 가난과 풍부함은 둘 다 우리에게 위기를 가져다 줍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브라함이 롯에게 제안했습니다. 이 좁은 공간에서 한정된 풀로 가축을 기르려고 하면 계속해서 싸움이 생길 수밖에 없겠다. 그러니 우리 둘이 좀 서로 좀 떨어지자고 제안했습니다. 영화 제목처럼 헤어질 결심을 한 겁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롯에게 네가 먼저 결정해라고 결정권을 주었습니다.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할 것이라고 하면서 롯에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먼저 주었습니다.
1. 롯의 선택
사실 삼촌인 아브라함이 먼저 좋은 곳을 차지하고 남는 곳을 롯이 차지하는 게 상식으로 맞는 걸 텐데 아브라함이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었는데 롯은 사양하는 대신에 얼른 자기가 좋은 곳을 먼저 선점했습니다.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함께 살던 곳은 벧엘과 아이 사이라고 했습니다. 이 지역은 해발 800m 정도 되는 산지였습니다. 그곳에서 동쪽을 내려다 보면 요단 강 주위의 평지가 보였을 겁니다. 산지는 비가 오는가 안 오는가에 따라서 풀의 양이 들쭉날쭉한데 반해 요단강 주위의 평지는 물가에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훨씬 더 비옥한 땅이었을 겁니다.
롯이 요단 들을 바라보았을 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 13절을 읽어봅시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이 요단 지역을 바라보았을 때 물이 넉넉해서 마치 에덴동산 같기도 하고 애굽 땅 같기도 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방금 읽은 13절 말씀을 보면 뭔가 잘못될 것을 암시하는 단어들이 보입니다.
첫째는 애굽이란 단어입니다. 롯이 선택한 땅이 애굽처럼 풍요로운 땅이었다는 말을 들을 때 뭔가 떠오르는 이야기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지난 주 말씀에 보면 아브라함이 기근이 닥쳤을 때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 풍요로운 땅 애굽으로 갔다가 하마터면 아내를 빼앗길 뻔한 끔찍한 사건이 있었죠. 그런데 그때 아브라함 부부만 간 애굽으로 간 게 아니라 아브라함과 함께 했던 식솔들 전체가 다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같이 살던 롯도 당연히 같이 애굽에 갔었고 애굽에서 겪었던 끔찍한 일 한 복판에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13절 말씀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 롯, 당신도 풍요로움을 좇아서 애굽에 갔다가 엄청나게 낭패 겪는 걸 보았으면서도 또 똑 같은 선택을 하는 건가요?”
두 번째로 뭔가 잘못된 선택이라는 걸 암시하는 단어가 있는데 바로 소돔과 고모라 입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앞으로 소돔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걸 미리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소돔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 놓여 있는 타락한 도시였고 그 도시의 문화는 인간의 타락이 극에 달한 문화인데 지금 롯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단지 물이 많고 풍요로운 땅만 바라보면서 달려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는 풍요는 보았지만 타락은 보지 못했습니다. 풀은 보았지만 심판의 그림자는 보지 못했습니다.
또 한 가지 뭔가 잘못 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11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여기에 보면 동으로 옮기니라는 말이 나옵니다.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거죠. 그런데 창세기 초반부에서 동쪽은 단순한 방향이 아니라 주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방향을 이야기 할 때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에 에덴에서 쫓겨났을 때 그들은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났습니다. 그 이후에 창세기 4: 16에 보면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이후에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 나가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라고 했습니다. 가인은 아담과 하와보다 더 동쪽으로 갔는데 여호와 앞을 떠나라는 말과 함께 나옵니다.
그 뒤에 창세기 11: 2에 보면 사람들이 바벨탑을 건축할 때 **“이에 그들이 동쪽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라고 합니다.
그런데 롯이 다시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쪽으로 옮겨 갔다는 겁니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 동쪽 방향으로 가서 요단 들 쪽으로 갔는데 요단강은 약속의 땅 가나안과 바깥을 나누는 경계선 같은 곳입니다. 롯이 요단을 넘어갔는지 안 넘어갔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롯의 후손인 암몬과 모압이 요단 동쪽에 자리 잡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결국 롯은 아브라함과 헤어져 동쪽으로 이동했고 그 결과 그의 후손은 약속의 땅 바깥쪽으로 밀려나서 이방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롯은 눈을 들어 풍요로운 요단 들을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해 그의 눈을 들지 않았습니다.
결국 애굽, 소돔, 동쪽이란 단어를 조합해 보면 롯의 선택은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리 떠나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상에 동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름에 캠핑 가서 모닥불 피워놓고 있으면 어디선가 불나방들이 날아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 나방들은 캄캄한 밤에 밝은 불이 있으니까 불빛을 보고 날아온 거겠죠.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 나방들이 모닥불에 뛰어 들어 타 죽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죽을 줄도 모르고 밝은 빛만 바라보고 날아와서는 죽는다는 말입니다.
지금 롯의 선택이 그런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보다 세상의 풍요로움을 더 소중하게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그게 좋아 보였겠지만 롯의 일생을 그래프로 그려 본다면 점점 더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더 좋아 보이는 요단으로 갔다가 거기서 더 풍요로워 보이는 소돔으로 들어갔고 전쟁 포로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소돔이 불 바다가 될 때 겨우 목숨만 건졌습니다. 후일에 그의 딸들의 불륜을 통해 암몬과 모압 자손의 조상이 되면서 하나님의 약속에서 완전히 이탈하게 되었습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보았을 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 보다 눈에 보이는 게 더 중요했고 결국 자기 자신을 파멸의 길로 몰아넣었는데 롯 역시 비슷한 과정을 겪고 있었습니다. 신학자 칼뱅은 롯의 행동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롯은 자신이 낙원에 거하고 있다고 착각했다. 그러나 그는 지옥의 심연 속으로 던져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때 얼마나 재미 있는 곳인가? 얼마나 돈을 많이 버는 곳인가 보다 더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주님과의 관계가 더 멀어지지는 않는지, 신앙생활에 심각한 장애가 오는 건 아닌지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더 키 큰 사람, 더 예쁜 사람만 찾지 말고 정말 믿음 좋은 사람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는 사람을 만났으면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집을 준비할까 하는 것 보다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믿음으로 세울까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 없이 밝은 빛만 보고 달려가다가는 불나방 같은 신세가 될 수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2. 아브라함의 선택
롯의 선택이 하나님 대신 세상을 좇아가는 선택이었다면 아브라함의 선택은 어떠했을까요? 아브라함은 어느 쪽이든 상관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 같이 8-9절을 읽어봅시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라함은 롯이 가는 반대쪽으로 가겠다고 말합니다. 나는 어느 쪽이든 상관 없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그는 무슨 배짱으로 이렇게 말했을까요? 분명히 더 풍요로운 땅이 있고 더 삭막한 땅이 있을 텐데요. 사실 그는 더 큰 약속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그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신 그 약속을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배경에는 애굽에서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이미 풍요로운 땅을 찾아 애굽으로 내려가 본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분명 풍요로웠고 많은 재물도 얻었습니다. 하지만 아내를 빼앗길 뻔한 아찔한 순간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애굽에 다녀온 이후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풍요로움을 좇아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 거구나 라는 걸 깨달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주셨는데 이 땅에 있다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켜 주실 것이고 나는 아무 상관 없다는 것이 그의 태도였습니다.
이런 걸 상상해 봅시다. 여러분이 한 나라의 왕자인데 백성들이 어떻게 사는지 살펴보기 위해서 백성들 몰래 평범한 백성의 모습으로 세상을 돌아다닌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래서 어떤 식당에 들어갔는데 나보다 뒤에 들어온 사람이 먼저 음식을 받았다고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주인에게 따질까요? 옆의 사람에게는 김치를 주면서 내 테이블에 김치가 안 나왔다고 소리를 지를까요? 어떤 사람이 뭔가 급하니까 양보 좀 해 달라고 하면 나도 바쁜데 왜 그러느냐고 따질 것 같습니까? 어떻게든 내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그 사람과 아웅다웅 다투겠습니까? 그냥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내 나라 백성들이고 이 나라가 다 내 건데 라는 마음으로 다 양보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가진 것이 얼마 안 되기 때문에 나도 가지고 싶은데 누가 그걸 양보하라고 하면 엄청 힘들 겁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이 이런 거였죠. 그는 가나안 땅 전체를 하나님께 약속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롯이 어느 쪽을 차지한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안달복달 할 상황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롯이 떠난 이후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다시 한 번 구체화시켜 주십니다. 우리 같이 14-15절을 읽어봅시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동서남북 모든 땅이 다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땅입니다. 사실 이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단지 넓은 땅을 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되게 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약속을 신뢰했습니다. 후일에 그는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주했습니다. 헤브론은 가나안 땅 중에서 그래도 비교적 강수량이 많은 지역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해발 930m 정도 되는 고지대였기에 비가 오지 않으면 물을 구하기 힘든 지역이었습니다. 롯이 선택한 요단 들은 바로 옆이 요단강이었기 때문에 물 걱정을 안 하는 곳이었기에 인간적 생각으로는 요단이 훨씬 좋은 곳이지만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는 번영 대신에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쪽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는 그런 믿음의 고백을 담아 그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런 고백을 한 거죠. 주님! 주님만 계시면 됩니다. 주님이 함께 해 주신다면 저는 어느 쪽으로 가든지 상관 없습니다.
사실 성도는 이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주인들입니다.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할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우리 아버지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꺼이 손해 보는 길, 남에게 양보하는 길로 갈 수 있는 겁니다.
3. 예수님의 선택
예수님께서도 이런 내용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6: 31-33을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전에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갔던 것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던 삶이었다면 롯과 대화하는 장면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셨습니다. 그 넉넉한 마음으로 약자들과 함께 할 수 있으셨습니다. 하늘 영광 대신에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권리 대신에 순종을 선택하셨습니다. 자신의 생명 대신에 우리의 생명을 선택하셨습니다. 롯은 좋은 땅을 붙들었지만 결국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내려놓으셨지만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을 붙드는 선택은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롯의 길로 가려고도 하고 아브라함의 길로 가려고도 합니다. 직장을 선택할 때, 배우자 선택할 때,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고민할 때, 어디에 시간을 더 써야 하는지를 고민할 때, 어디로 이사해야 하는지 고민 될 때 늘 질문해야 합니다. 이 선택이 나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는가 아니면 점점 더 동쪽으로 가게 하는가? 세상은 말합니다. 더 좋은 조건을 잡아라.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오늘 이 말씀은 제가 중요한 결정을 할 때 큰 영향을 미친 말씀입니다. 바로 우리 동네에 교회를 개척할 때입니다. 당시 병점이라는 동네가 새로 입주할 때였는데 그곳에 가니 수많은 이삿짐 차들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여기가 내가 교회를 개척할 곳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찬찬히 그 동네를 살펴보니 이미 많은 건물에 교회가 들어와 있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굳이 나까지 들어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있을 때 어떤 분이 우리 동네에 있는 한 다락방에서 이 곳에 교회가 개척되길 기도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곳에 왔는데 당시 우리 동네는 그야말로 논밭과 과수원, 축사가 있는 농촌 마을이었습니다. 주위에 저를 아끼던 많은 분들이 우리 동네는 개척하기 적당한 곳이 아니라고 말렸습니다. 병점과 남양을 놓고 고민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제 속에 있는 야망을 보게 하셨습니다. 교회 개척이라고 하는 멋진 포장지 안에 더 큰 교회를 세우고 싶은 제 욕망이 숨어 있음을 보게 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어디로 가든지 상관없다는 마음을 주셨고 그래서 이 곳에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아무 것도 없는 40대 초반의 목회자가 개척한 교회, 그것도 산 속 과수원에 있는 교회에 100여명의 성도님들이 같이 동참하셔서 우리 교회가 세워졌던 겁니다. 그분들도 안산의 큰 교회 다닐 수 있었지만 우리와 함께 하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개척에 동참했던 겁니다.
정말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들은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면서 감사와 기쁨으로 살 수 있는 겁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여고 동창생 세명이 만나서 식사를 했는데 식비가 10만원이 나왔습니다. 처음에 오랜 만에 만난 동창들이 서로 자기가 돈을 내겠다고 막 싸우더라는 겁니다. 하도 그러니까 식당 사장님이 그러지 말고 세 분이 똑 같이 1/3씩 내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각자 3만 3천원씩 내기로 했는데 그러고 나니 1,000원이 모자라는 거에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왜 자기가 1,000원을 내야 하냐고 싸우더라는 겁니다.
요즘 우리 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정말 각박해지고 있습니다. 누가 나에게 조금이라고 손해를 끼치면 바로 고소하고 법적으로 대응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 딸들입니다. 남들이 볼 때는 가진 것 없는 초라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좀 더 손해 볼 수도 있고 좀 더 희생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게 아브라함이 걸어갔던 길이고 우리 주님께서 걸어가셨던 길입니다.
내일부터 특별 새벽기도회가 시작됩니다. 특새 때 우리는 희년 헌금을 드립니다. 그리고 이 헌금은 주위에 있는 가난하고 어려운 분들이나 개척 교회를 돕는 일에 사용됩니다. 우리가 넉넉한 부자여서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에도 쓸 곳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헌금을 이웃에게 나누는 것은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뒤에 계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 없지만 가장 부요한 사람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결론
인생은 끝없는 선택의 연속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때로 흔들리고 실패할 때도 있지만 결국 우리의 나침반 되신 하나님을 붙들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책임지십니다.
세상은 더 좋은 조건을 잡으라고 유혹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롯처럼 세상의 풍요를 좇다가 모든 것을 잃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마십시오. 아브라함처럼,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꺼이 양보하며 섬기는 복음의 부요한 자가 되기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